










한강 작가의 글은 건조하다. 미사여구로 감정을 싣지 않는다. 쓸쓸하다. 그렇지만 따뜻하다. 건조한듯 따뜻한 시선으로 슬프고 소외된 삶을 어루만진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다. 마음이 너무 아파 띄엄띄엄 읽다 그나마 다 읽지도 못하고 책꽂이에 잠긴 '소년이 온다'가 떠오른다.
여러 유명한 작가들의 솜씨가 실린 이 책을 나는 오직 한강 작가의 단편, '작별'을 보기 위해 샀다.
나는 단편에 손을 잘 대지 않는 편이다. 일부러는 아니고, 어쩐지 가볍게 느껴지는 선입견, 그리고 짧은 호흡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단편은 시와 마찬가지로 함축된 메시지가 장편보다 깊고, 정곡을 찌르기 때문에 너무 감정적이고, 잘 휩쓸리는 내가 그 점을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즉 단편에 손을 잘 대지 않는 이유는 내가 시를 멀리하는 이유와 같다. 함축된 문장은 내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까...시와 단편을 읽기엔 내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후. 약점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건 정말 힘든일이야 ;ㅁ;
이 책은 내가 만드는 신문에 발췌할만한 구절이 없을까 해서 인터넷 서점의 미리 보기로 몇 페이지 봤던 건데, 서너 페이지만에 완전히 몰입했을 뿐만 아니라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뒤가 너무나 궁금했던 점, 극 사실주의 작가인 줄 알았던 저자에게 느낀 의외성 등 당장 뒤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에 갔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기다림 없이 오랜만에 '동네 서점'에서 구매했다.
'작별'이라는 작품은 제12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 했고, 책에는 본선(?)까지 진출했다 아깝게 수상을 놓친 예닐곱 편이 함께 실려 있다. '안녕 주정뱅이'라는 작품으로 만나본 권여선 작가의 단편도 포함이다.
작별은 '존재와 소멸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경계에 대해 말하다'라고 한 줄 요약 되어 있다. 존재와 소멸이라는 매우 형이상학적이면서 추상적 개념을 굳이 어려운 말로 복잡한 개념을 설명하려하지 않고 '눈사람'이라는 소재를 이용한 것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눈사람은 흔한 소재다. 겨울의 대표 이미지고, 동심과 순수 그리고 놀이 등 여러가지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 벌써 개봉한지 5년이 다 돼가는 대흥행작 '겨울 왕국'에서도 눈사람이 등장해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인공 자매를 돕고 화해를 이끄는 '절대 선한 존재'로 활약 했을 정도다. 달리 말하면 이미지가 워낙 고정되어 식상하기 쉬운 것도 눈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치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눈사람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는 특징에 착안해 이야기를 풀어낸 점이 독특하고 신선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중독된 나로서는, 사람이 눈사람으로 변하면.......그냥 추운데서 눈사람으로 변한 사람들끼리 잘 살거나, 나를 눈사람으로 만든 악마를 찾아 모험을 떠나다가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 힘으로 악마를 물리친 후 잘 살았을 거라고, 고작 그런 이야기나 만들어 냈겠지.(ㅋㅋㅋ)
'작별'은 주인공이 버스정류장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연인을 기다리는 아주 짧은 순간에만 인간이었다가 깜박 잠이 든 사이 눈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나는 그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괜찮을까요? 내가 눈사람이 되었는데요. (p.16)
곧 도착할 남자친구에게 눈사람이 됐다고 무덤덤히 고백하는 말투가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피식 웃어버렸다. 왜 놀라지 않을까. 나의 피부와 눈동자, 머리카락, 두 다리가 눈뭉치로 변해 버렸는데 어째서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을까. 어쩌면 진짜 '나'를 잃고 사회가 정해준 역할에 소비되는 현대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사람 모양이든, 눈사람이든, 뭐든 상관없었던 걸지 모른다.
작년인지 재작년 언제쯤 아주 인상깊게 읽은 장강명 작가의 '표백'이 생각났다. 각각의 다채로운 색깔을 갖고 태어나 점점 선명하고 영롱하게 성장하지만, 성년이 되어 사회로 던져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각각의 개성과 꿈과 특징을 모두 표백당하고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기성세대가 필요한대로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을 독한 어조로 비판했던 '표백'을 읽고 심하게 감정이입해 한동안 우울했었다.
눈사람도 마치 표백된 인간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도 없고, 영혼도 사라져 버려 살짝만 자극해도 부스러지는 나약한 인간, 그 나약한 몸이나마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당하더라도 다시 사회가 시키는대로 살 수밖에 없는 빼앗긴 인간. 꿈도 바람도 희망도 없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회사가 정해준 가치대로 살 뿐인 사람의 몸이 오장 육부가 붙어 있으면 어떻고, 눈사람이면 어떻단 말인가.
눈사람이 된 후 그가 풀어내는 그의 삶은 쓸쓸하고 힘겹고 정체되어 활력을 잃은 지 오래된, 그야말로 삶을 겨우 '버티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는 스물 셋에 결혼해 이듬해 아이를 낳고, 17살 아들을 10년 째 혼자 키우고 있다. 작가는 이혼녀로써의 삶이 얼마나 각박하고 힘든지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 '아이 딸린 이혼녀'의 삶이란 굳이 절절한 단어로 묘사하지 않아도 누구나 예상가능하다.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까지 견뎌야만 하는 고행길을 걸어야 한다. 자신의 인생 대신 '가족'을 선택한 이들은 관심, 애정,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빈곤을 견뎌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대학에서 졸업하자마자 아이를 낳은 주인공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차별과 편견에 시달려왔음이 틀림없었다.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을 테고, 아이에게 엄마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을 테고, 그러면서도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살아왔을 터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엄마를 답답해 하고 멀리하지만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는 그 상황에서 또 한 번 좌절을 느꼈을 터다.
힘든 와중에 '그의 경력과 실력이 비슷한 사람을 같은 월급으로는 쓸 수 없기 때문에 내버려두고 있던(p.26)'그에게 회사가 내민 것은 '권고사직'. 힘든 와중에 그가 만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해결책도, 해결 의지도 없는 가난에 수인처럼 갇혀 있기 때문에 앞날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고 나눌 수 없는(p.31)' 일곱 살 연하의 취준생 연인. 고달픈 그의 삶이 누적돼 그는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표백'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퇴근 무렵이면 언제나 어깨가 아팠고, 특히 머리와 목을 연결하는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직장인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몸의 방향을 바꾸기도 어려운 지하철에서, 언제나처럼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다고, 그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했다. 자신이 손목을 끼우고 매달려 있는 끈끈한 플라스틱 손잡이, 캄캄한 지하 터널을 향해 뚫린 검은 차창, 어깨에 매달려 있는 낡은 가방, 그 속에 소리 없이 담겨 있는 지갑이나 필통이라고 상상했다. (p.28)
눈사람으로 변해버리자마자 그는 자신의 죽음, 소멸을 예상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할 준비를 했다. 아들을 만났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고,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줘야 할 남동생에게...연락을 하려다 말았다. 그가 삶의 끝을 준비한 것은 눈사람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유서를 남기는 등 갑작스럽고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물처럼 변해가는 자신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릴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이다. 혹자는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몰라서 두려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장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은 후 어떻게 될지 몰라서라기 보다는 남겨진 모든 인연과의 이별이 슬프고 외롭기 때문인 것 같다. 죽음은 외롭다. 함께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은 공평하다. 누구나 죽는다. 불공평과 불공정이 만연한 사회가 됐지만 단 하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더 오래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은 죽음을 앞둔 마땅한 태도일까.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만났을 때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이 뜨거워져 녹아내리고, 눈물이 흘러 눈두덩과 두 뺨이 녹았다. 연인을 만나서는 함께 밥을 먹을 수도 손을 잡거나 가까이 안을 수도 없었다. 눈사람이 된 그가 녹는 것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처음 만든 눈사람을 간직하고 싶어 냉동실에 넣어뒀지만, 구멍이 숭숭 나서 결국은 녹아버린 것처럼 눈사람은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하지 않았다. 따뜻한 체온과 피부를 가지고 있던 오래 전부터 '사물'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그다. 상황을 비관하는 대신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나 자신의 소멸을 준비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슬펐고, 한편 고귀했다. 삶의 끝 자락에서 '나는 언제까지 사람일까' 번뇌하는 그에게서 '인간다움'을 느꼈다.
언제까지가 사람일까. 그의 몸은 눈사람이 됐지만, 심장은 뜨거웠고, 마음이 아프면 눈물이 흘렀다. 몸이 녹아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은 사람과 따뜻한 키스로 이별한다. 존재'와 '존재가 아님'의 경계는 어디일까. 사람과 사물의 경계는 어디일까.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정수리부터 녹은 머리가, 눈 녹은 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리면?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그냥 끝이야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여 그녀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홀가분했다. 미치도록 후련했다. 아니, 억울했다. 이가 갈리게 분했다. 아니 아무것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p.53)
내가 눈사람이 됐고,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면 소름끼치고 무섭고 막막한데, 글을 읽는 동안 아무것도 막막하지 않았다. 나도 그를 따라 편안하게(?) 소멸을 받아들이며 내가 작별해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실이 그에게 준 것은 잔인하지만 미치도록 딱딱한 현실 속에서도 내가 살아가야 할, 나를 인간답게 살게 할 이유들은 분명히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 가지 화두를 오랫동안 생각할 것 같다. 내가 인간임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이 세상과 어떻게 작별할 것인가. 인간성을 잃은 것이 죽음일까, 눈사람이 되는 것이 죽음일까.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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