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2018/10/10 17:23

#8. 시녀이야기 정독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황금가지













532페이지,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책을 어제 휴일 하루를 통째로 내어 샅샅이 읽어 내렸다. 멈출 수가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분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책이었다. 엔딩마저 아쉬운지 시원한지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책이었다. 연휴 마지막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두 시까지 이 책을 읽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설정을 두고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세계만 생각해서 지금 이 시점(2018)보다 미래의 일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85년. 내가 두 살 때다. 어쩐지. 컴퓨체크, 컴퓨토크 이런 어색한 신조어가 나오더라니.(뒤에 찾아보니 이 책은 1984, 멋진 신세계 등과 함께 디스토피아를 그린 3대 소설이라고)

지금 이 책으로 드라마가 제작돼 지난해 에미상을 휩쓸었다고 하니 워낙 유명한 시놉이라 이곳에 적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지나친 난개발, 전쟁, 환경 오염, 각종 성질환 등이 인간의 건강에 영향을 끼쳐 인류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출산마저 어려워진 때, 기독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부 극우 보수주의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여성을 가임-비임 여성으로 계급을 나눠 가임기 여성을 출산 집단화시키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시켜버렸다는 세계관이다. 소름이 끼쳤다. 작가는 1980년대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책은 독특한 구조다. 전적으로 화자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다. 화자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다. 주인공인 화자는 본인이 출산 도구인 ‘시녀’계급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하거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회상하는 등 특별한 짜임새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해 나간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독특한 액자식 구조를 느꼈는데, 주인공의 내면과 주인공이 살고 있는 외부환경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인식되며 독자인 나 역시도 주인공의 안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갔다 하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안개 낀 듯한 뿌옇고 우울한 기분이었다가 실제 그의 생활을 설명할 땐 선명한 영화 같은 느낌. 작가의 필력이 사뭇 감탄했다. 처음엔 이렇게 하루 종일 붙들고 앉아 읽을 생각도 아니었다. 두껍고 다소 무거운 내용의 책이니 천천히 나눠서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빠져들게 된 것이다.

문장도 수려했다. 그저 내용과 아이디어만 번뜩이는 것이 아니라 문체 하나하나 아름다웠고, 또한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시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은유와 사설을 넘나드는 작가의 필력에 쏙 빠져들어 마지막 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은 원래 직장과 아이와 남편이 있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족의 일원이었다. ‘어떤 사건’이후 그는 가임 여성으로 분류돼 강제로 ‘시녀’계급에 편성됐고, 그에 맞는 교육을 받는다. 교육이라는 것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숙명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신성한 일 우리는 우리의 몸을 국가 존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 명령에 거역하지 못하는 아주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인 그는 저항하는 친구와 다르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야말로 애쓰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여성들은 먼저 직장과 돈을 빼앗긴다. 여성에게 '일'을 할 권리와 '돈'을 쓸 권리가 사라진다. 그다음은 이름을 빼앗긴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정체성과 존엄성을 뺏기는 아주 큰 문제다. 우리도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에. 그들은 민족정신과 얼을 훔치고 완벽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단 말과 이름을 뺏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게 된다. 주인공 역시 본명을 빼앗기고 '오브프레드'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of fred. 그러니까 프레드의 사람이라는 뜻이며 여자가 다른 사령관에게 배정됐을 때 배정된 사령관의 이름으로 바뀐다. 예컨대 of smith. 인격은커녕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이며 이런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기력과 의존성이 학습되버린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정책이다. 

작가가 묘사한 것 중 사령관 집에 배속된 시녀가 사령관과 관계를 가질 때의 장면이 가장 괴이했다. 사령관의 아내가 다리를 벌리고 침대에 기대앉으면 하얀 면속곳만 빼고 드레스업 한 시녀는 아내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아내의 배 위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내는 팔을 뻗어 시녀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시녀의 양 팔을 위로 당긴다. 그러면 옷을 모두 갖춰 입고 바지만 내린 사령관이 시녀의 드레스를 들추고 다리를 벌려 그야말로 ‘관계’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꼬락서니인가. 책을 손에 놓고 ‘기억’에만 의존해 독후감을 쓰는 지금도 그 장면이 너무나 또렷하다. 성관계에서 주는 쾌락은 그저 오락일 뿐이며 성관계는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궤변이 만들어 낸 미친 장면이다. 

주인공은 ‘의례’라 불리는 그 관계를 가질 때 동물처럼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애처롭고 또 애처롭다. 그는 스스로 그저 아이 낳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우고 자괴감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반면 사령관은 고귀하다. 두 여성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마치 책을 읽듯이 사정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리를 뜬다. 열등감을 주는 것도 하나의 장치다. 그들이 여성을 ‘동물’로 취급하기 위해 만든 장치에 상처받는 것은 여자와 여자. 아내와 시녀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인 중 한 명도 ‘전국 가임지도’라는 것을 만들어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출산율이 갈수록 떨어지니 전국의 가임 여성을 조사하고 분석해 그들이 아이를 낳게끔 하자는 것이다. 같은 정치인이 했던 말 중에는 ‘외국에서 아이 및 여성을 수입하자(갑자기 조선족도 우리 식구)’는 것도 있었다. 

성과 권력과 여성인권과 종족 번식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하게 만든 이 책은 결국 주인공이 탈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주인공은 빛을 만났을까, 어둠을 만났을까. 하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2195년(맞나?) 어떤 학술회를 묘사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것은 주인공의 독백이 담긴 테이프를 녹취한 것이며, 그런 테이프를 남겼다는 것은 그가 살아남아 지하에서 저항했다는 의미일 테니까. 

1984등을 비롯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보고 나면 나는 이것이 암울한 세계인지, 암울함 속에서 빛과 희망을 찾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시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부조리하고 비도덕적인 현실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독자에게 깨달음을 주고 올바른 방향이 어디인지 한 번 더 생각하는 기회를 준다. 작가는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이 ‘잘못됐다’고 알려주고 사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고 통찰력도 뛰어나 감명받은 문장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내 감정이 가장 고조됐던 부분은 여기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 망상에 시달리는구나. p.310


우리에겐 아직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뭐가 남았는지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자기 루크는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루크는 아무것도 빼앗긴 게 없었다. (중략) 나는 쪼그라든 기분이 들었고, 그가 팔을 내게 두르고 안아 올렸을 때는 인형처럼 작아진 듯이 느껴졌다. 사랑이 나만 버려두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 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p.315


남자와 여자 즉 이성은 '이성'일 뿐 같은 행복을 추구하고 같이 아파하는 '인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성 차이를 힘과 계급의 차이 또한 그것이 권력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남성이고 여성이고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자각해 '차별받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누가 누구의 우위에 서겠다는 권력 다툼이 아님을 모든 인류가 알고 변화해야 한다. 1985년에 나온 소설이 꼬집는 바를.

작가는 이 소설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등의 용어가 붙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아마 편견에 시달리기 싫어서라고 생각한다. 보다 많은 사람이 읽고 보다 보편적인 평가와 해석이 나오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2018/10/04 16:15

#7. 체실 비치에서 정독



남편의 동의하에(슬프다ㅠㅠ) 모처럼 자체영화제를 가졌다.
(*자체영화제는 내가 그냥 만든 말로 영화제에서 영화보듯이 하루 온종일 시간 맞춰서 영화만 보는 날을 말함)

지난 달 말에 안시성과 명당을 연이어 봤다가 너무나 빡치고 그 분노가 오랫동안 가라앉지를 않아 고생한 후로 '잘 만든 영화'에 매우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 영화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세종에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으므로 그 자체에 대한 갈증도 자체영화제를 부추겼다. 결혼 후 달라진 점은 하루 온종일 영화관에 앉아 있으려면 남편에게 허락을 득하거나 최소 '보고'는 해야 한다는 것. 속상했지만 그래도 나의 취미문화생활을 이해해주는 남편을 가진 것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허락을 득하는 척 보고하는 것은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하고 있다.

황금같은 휴일을 하루종일 내서 영화를 본다는 부인을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이미 남편은 내가 일전에 안시성+명당 크리로 매우 분노에 쌓여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거절하기 힘들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별 관심 없는 영화를 종일 함께 보기엔 두렵고 혼자 남아서 집을 지키는 것도 심심하니, 남편은 스스로와 타협해 내가 보겠다고 내놓은 영화 다섯 편 중 두 편을 함께 하고 한 편은 포기하기를 부탁했다. 나로써는 마지막 영화(너는 여기에 없었다)가 아쉽기 그지 없었지만 -왜냐하면 케빈에 대하여 이후로 이 감독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어서 매우 궁금했음- 남편의 양보와 배려에 나 또한 욕심을 줄였다. 

그래서, 내가 하늘이 열린 날 본 영화는 1)곰돌이 푸:다시 만나 행복해 2)체실 비치에서 3)라스트 포트레이t 4)판타스틱 Mr.폭스
남편은 1, 2를 함께했다. 1은 남편의 의지고 2는 나의 요구였다. 남편에게 이성의 사랑 속에서 생기는 갈등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체영화제에서 본 영화들 중 내가 리뷰하려고 하는 것은 '체실 비치에서'다.
당일 본 영화 중 가장 여운이 많이 남아 있다. 이언 매큐언 소설 베이스라고 하는데, 이번엔 저자가 각본까지 참여했다고. 그의 소설은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단한 이야기꾼+필력가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흡입력있는 시나리오를 언제 보았던가. 안시성+명당 콤보로 인한 상처가 싸그리 씻겨 내려갔다. (아니 이미 곰돌이 푸에서 씻겼음 ㅎㅎ)
  
영화는 대충 이렇다.
대학 졸업반(맞겠지)에 만난 두 어린 연인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결혼했으나 아직 어린 관계로 좋은 감정, 사랑하는 마음만을 나눌 줄 알았지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할 줄 몰라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뜨겁게 사랑했음에도 이별을 맞는다.

매우 진부한 사랑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막상 까보면 이렇게 훌륭할 수가 없다. 왜 훌륭한가, 하면 헤어지는 연인들의 오해와 빗나간 애정, '잘모름' 등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뭉뚱그리지 않는다. 

먼저, 이 영화는 라라랜드와 비교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첫사랑, 실패, 황혼의 만남, 깨달음 등 라라랜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다만 주인공들이 노래를 하지는 않음 ㅎㅎ) 처음 영화를 보는 동안은 두 주인공이 아주 예쁘고 귀여워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린 연인, 열정적이지만 풋풋한 사랑, 첫 경험, 부끄러움, 자존심, 체면...처음 사랑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연애나 결혼 등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달랐던 2명의 타인이 서로의 세계를 만나게 하고 나아가 그 세계를 조금씩 합치려는 시도다. 두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는 두 개의 세계는 서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연애(결혼)이다. 각자의 상처와 부끄러움 등을 숨기고 자신의 길을 걷던 두 사람의 길이 합쳐지기 위해서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려놓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 

나는 이 영화가 그 두 세계의 만남을 아주 섬세하게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 세계가 교집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 모습을 그 옛날 그 과정을 겪어온 사람의 정곡을 찌를만큼 적나라하고 확실하게 보여준다.  

남주 에드워드는 역사학을 전공했고, 나무 이름도 새 이름도 잘 아는 (여친 엄마에 따르면) '순진한 촌뜨기'로 아픈 어머니 때문에 항상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청년이다.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게 생겼는데 집에서 아무도 관심이 없자, 1등한 것을 자랑하거나 칭찬받고 싶어서 밖으로 돌아다닌 것이 여주를 만난 계기가 됐을 정도다. 

한편 여주 플로렌스는 부유한 집안이지만 엄마도 아빠도 여주의 남친이 기우는 집안의 아들일까봐 걱정하는 조금 허영심 많은 부모의 딸인데다가 본인은 클래식(바이올린)을 전공했으며 크로아상과 바게트가 뭐가 다른 줄도 모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다.

이렇게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모두 다른 두 남녀가 사랑과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물들이는데, 플로렌스의 콰르텟을 보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플로렌스의 꿈을 이해하고 응원하려는 에드워드와 에드워드의 아픈 어머니가 그의 가장 큰 상처라는 것을 알고 어머니와 두 동생을 변화시키고 그의 집을 정돈하는 플로렌스는 살면서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일들을 '사랑'이라는 힘으로 조화시켜 나간다. 

하지만 (내 생각엔) 플로렌스의 상처를 에드워드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서 두 사람 간의 균열이 시작됐다. 보아하니 플로렌스는 어릴 적 아버지한테 성추행 비슷한 일을 당했던 것 같은데...영화는 그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예비사위와의 기싸움에서 지는 것을 본 딸에게 열폭 이상의 화를 낸다거나, 어릴 때 아버지와 둘이 간 여행 회상 장면을 군데군데 삽입한 것, 결정적으로 에드워드가 사정할 때 어린 플로렌스가 누워서 몸을 사리고 있고 아버지가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 것이 바로 플로렌스의 상처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아픔을 사랑하는 에드워드에게 말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못한다. 오히려 갈등이 폭발한 뒤에 '우린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니까 섹스 없이도 잘 살 수 있잖아. 원한다면 다른 여자와 해도 좋아, 널 사랑하고 너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라고 애원한다. 에드워드는 당연히 사랑하는 플로렌스가 자신에게 '다른 여자와 자도 좋다'라고 말하는 것에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에드워드가 플로렌스를 기다려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랑하는 둘은 그래도 헤어졌을까. 분명 둘은 서로를 배려했고,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서로 조금만 다른 방법으로 배려했으면 어땠을까. 아니, 다른 방법으로 배려하는 법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둘은 서로의 세계를 합치려고 맹세한 그 날, 실패해버렸다. 결국 둘은 함께 걸어가기를 포기하고 각자의 삶으로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연애할 때는 양보하고 눈치 보며 상대방에게 맞추고 희생하다가 결혼생활을 목전에 두고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관계가 깨졌다. 

에드워드는 '함께 돌아가자'는 플로렌스를 거부했고, 결국 둘은 결혼한 지 하루만에 이혼했다. 

아프다. 아팠다. 왜냐면 나이가 먹은 나는 이제, 그런 상황이 오면 저런 오해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배려랍시고 '다른 여자랑 자도 돼'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지금 당장 섹스가 어렵다고 했을 때 '넌 나쁜 여자야 사이건 사기결혼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중한 첫사랑이 깨졌을 때 참 마음이 아팠다. 나도 그땐 그랬을테니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땐 몰랐을테니까.

영화는 그들의 황혼기까지 보여줬다. 에드워드는 히피 청년으로 살아가고, 플로렌스는 결혼해 세 자녀와 몇 손자를 두면 살았다고 말이다. 굳이 플로렌스의 결혼생활을 설명한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섹스는 못하겠어!'라고 울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플로렌스는 그 아픔을 잘 극복했는지 금슬 좋게도 자녀를 셋이나 두고 은퇴를 앞뒀다. 아마 에드워드의 어리숙함과 어리석음을 꼬집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섹스를 못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흔히 예상 가능한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가 경제적 차이나 교육수준 등을 넘어서서 훨씬 더 복잡하고 사적인 이유로 이별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커플을 보여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 말미에 눈물을 쏟았다. 뻔했지만 영화는 결국 나를 울렸다. 참 잘 만든 영화다.(나를 울려서가 아니고 ㅎㅎ)
여주인공인 시얼샤 로넌에게 반했다. 나는 이 배우를 '러블리 본즈'라는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그땐 참...못생기고 매력도 없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자주 나오지는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 사람보는 눈은 진짜 거지수준임.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나 레이디 버드, 그리고 반고흐(성우만) 이런 필모를 쌓으면서 무지 개성있는 배우가 됐다. 레이디 버드 때도 딱 맞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로 그 방점을 찍었다. 아주 아름다웠고 그 연기가 매우매우매우 훌륭했음. 

나는 영화에 감동을 받아 감독의 필모를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입봉작이었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영화를 연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감독. 도미닉 쿡. 차기작 나오면 반드시 꼭 다시 봐야지. 

아 그리고 OST도 감동적이었다. 안시성 싸구려ost때문에 너무 화가 났었는데, 이 영화는 과함도 덜함도 없이, 클래식과 로큰롤을 어찌나 제대로 조화시켰는지. 장면장면마다 필요하지 않은 음악이 없었고,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없었다. 귀마저 행복했다.  



2018/09/21 10:08

#6.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정독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피터 홀린스/포레스트북스

오랜만에 독후감을 쓴다.

그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읽고 나서 생각을 안 했다. 내게 꾸준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여간해서 개선이 잘 안 된다. 노오력을 안 한다고밖에 ㅎㅎㅎ

마침 마감이 끝났고, 마침 책을 다 읽었고, 마침 이 책은 쉬운 책이었다. 

언젠가 대전 대흥동에 놀러가서 '도시여행자'라는 서점에서 책을 산 적이 있다.  그때 받은 책갈피를 대수롭지 않게 집에 뿌려 두었는데, 그 후 부산여행에서 들른 작은 책방에서도 왠지 시리즈인듯한 책갈피를 주는 것이 아닌가. 강박증도 조금, 편집증도 조금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시리즈물(?)인 것을 알자마자 모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청주에 갈 기회가 생겨 청주의 독립서점을 굳이 검색해 굳이 가서 책을 한 권 샀는데 거기서도 받을 줄 알았던 책갈피를....못 받았다. 이건 뭐 광역시끼리만 하는건가? ㅠㅠ 무슨 말이냐면, 그러니까 지금 읽은 이 책을 청주에서 사 왔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벌써 두 번의 서점 방문에서 '약간의 거리를 둔다' '혼자가 좋다' 이런 책들을 고른 나를 알고 있었던 남편은 그 책을 내미는 나에게 '살 줄 알았다'라고 알은 척을 했다. ㅎㅎㅎ 
나는 혼자 하는 삶, 혼자 사는 삶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살아가는 하는 방식을 동경하고 롤모델 삼고 있는 것이 맞다.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고 또한 타인에게 영향받지 않고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고. 내면의 힘을 기르고 행복이 무엇인지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내가 할 수도 없는 것을 하려고 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고, 괜한 강박에 시달리면서 나 스스로를 들볶지 않기 위해서 소소히 혼자 살면서도 충분히 행복한 그런 미니멀라이즘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기 때문에 이런 책들을 본다. 혼자 사는 방식은 참으로 욕심이 없고 번뇌가 없다. 하루하루 태어난 날로부터 멀어지면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죽기 직전까지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조금 더 살고 싶다'라는 욕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제목은 아주 완벽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내향적' '외향적'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도 말한다. 더 보태자면 내향적외향인 사람과 외향적내향인 사람도 존재하며, 그것은 타고 날 수 밖에 없다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누가 더 훌륭하다고 판단 내릴 수 없음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했다.

나는 '외향적'이기를 강요당하며 자란 세대다. 내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살았던 1990년과 2000년대 우리나라는 엄청난 성장기였다. 내가 고작 30년 조금 넘게 살았는데 내 인생 속에는 '옛날'도 있고 '현대'도 있다.(여기서 옛날은 내 10대 때의 모습을 지금 세대에게 보여주면 50년 전 아니에요? 라고 말할 정도라는 것임) 그만큼 우리나라는 그 짧은 사이에 어마어마한 변혁기를 겪었다.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됐다는 추상적인 발전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엄청난 발전이 있었고 우리는 그만큼 성숙했다.

그런데 이 성숙은 제대로 햇빛을 받고 자란 성숙이 아니라 자외선램프같은 것으로 쪼여 억지로 성장하게 한 성숙이다. 사람들의 인식과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바꾼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받아들여' 식으로 변화했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 '나라의 기둥'이었던 우리들은 리더십, 앞서는 법, 성공학개론 등을 마치 수면마취주사 놓듯 한 번에 맞고 몸과 정신이 거의 마비된 세대가 됐다. 누구나 리더십이 있어야 훌륭한 사람이 될거라고 했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한 발 앞서야 했고, 성공신화들이 바이블처럼 읽혔다.

그러나 이것은 나 개인의 사정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통계학자나 연구자가 아니므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분명 그랬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는 그 시절의 사람이다.

저자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외향적'이기를 강요당하면서 살았다는 것.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의 성질은 '외향적'이라는 것. 이런 주입식 선입견에 사로잡혀 '내향적'성질, 말하자면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루저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는 것.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은 그저 에너지를 운용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외향적인 사람은 사교활동을 즐기면서 에너지를 얻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조용히 사색하면서 충전을 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내향적인 사람이 덜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몇 번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그동안 '힘들었을' 내향적인 사람들을 차곡차곡 위로해줬다. 

그래서 빨려들듯이 읽어내려갔다. 왜냐하면 나는 무지하게 내향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그리고 이 책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마치 점쟁이가 사주를 봐주듯, 작업남이 손금을 봐주듯 딱 알맞은 나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서 내면이 충만해지면 곧장 주변에 나와 관계한 사람들이 생각난다. 또한 운동, 영화관 등 외부 활동들을 하고 싶은 욕구도 생긴다. 그렇지만 어느 수준만큼 그것이 충족되면 나는 또 집으로 와야 한다. 그리고 며칠 집에 있어야 한다. 책도 읽고 집 청소와 정리 등을 하면서 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것은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 내가 필요한 행위들이다. 나는 친구를 만나고 싶지만, 몇 날 며칠 친구만 만나면서 살 수는 없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린다. 영화는 매니아 수준이지만 항상 무조건 영화관에 가는 것도 아니다. 춤을 추러 다니지만 춤만 추고 관계는 크게 맺지 않는다. 관계가 너무 많아지면 감당을 못한다. 

나는 이런 나의 성질이 매우 불만이었다. 외부활동을 좋아하는데 집에 있는 것도 좋아하는 상반되는 기질 때문이었다. 나는 일관적이지 않은 사람인가?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회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거 아닐까? 자기 편할 땐 나와 놀고, 싫으면 없고...제멋대로라는 뒷말을 듣게 되는 거 아닐까? 고쳐야 되는데 왜 고치지 못할까. 

그랬던 나이니,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와 위안을 얻었을밖에. 저자는 나의 기질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런 기질이 이상한 것도 아니며 사람이라면 아주 당연하게 가지는 '뇌활동'이라고 정의해줬다. 사람은 누구나 나 같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외향적인 사람도 없고, 완벽하게 내향적인 사람도 없으며 누구나 조금씩 두 성질이 섞여 조금더 많이 보유한 쪽의 기질이 드러나보일 뿐이라고.

이 책은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좋았는데 연구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라 그런지 중언부언 비슷한 말이 많고 결국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가 없다. 정의를 내려줬으면, 어떻게 살면 더 좋겠다고도 해줘야 하는데 '알려줬으니 이제 알아서 잘 사세요 바이바이^-^' 라고 끝맺으니 ㅎㅎ 뭐 모든 이런 종류의 책이 그렇듯 그런 마무리를 했다. 

심리학의 맹점인 것 같다. 인간 기질은 각각 모두 다르므로 분석은 하지만 대안은 결국 병목처럼 한가지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약간 무리한 비유일 수도 있는데,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그 유명한 첫문장에 대자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기질이 있지만 해결방법은 비슷하다'
이것이야 말로 난제 아닌가? 페르마의 정리 따위가 난제가 아니라 말이다.(물론 페르마의 정리는 풀렸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서 완독해버린 읽기 쉬우면서도 공감되면서도 약간 허무한 책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나를 잘 알면 내 나름의 해결책을 찾던지, 내 마음이 편해지던지 
뭐 하나는 건지고 깨달으며 살 수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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