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2016/08/11 11:32

덕혜옹주 뜬구름 잡기



태극기 휘날리며나 명성왕후, 우생순? 국가대표? 이런 종류의 영화에 워낙 지치고 실망해서인지
나는 당연히 관심갖고 봐야 할 우리 역사라던지, 슬픈 과거를 외면하는 편이다.
특히 영화로 만들어지거나, 공중파에서 특집으로 만들어진 다큐들은 극혐이다.  
가까이는 연평해전이나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만 해도 그렇잖아. 
애국심을 억지로 주입시켜서 '나라를 위한 희생은 당연하다' 고 생각하게 하고는
국가가 국민을 수탈하는 것을 정당화 해버리는 그런 구조가 난 싫다. 

당연히 덕혜옹주도. 
책도 관심 없었고 영화는 더더욱 그랬다. 
'고종의 막내 딸래미' 라는 것 정도만 알면 되잖아.
더군다나 나는 배우 손예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관심이 없는 영화여서 전혀 몰랐는데, 개봉즈음 쏟아지는 기사를 문득 보니
감독이 허진호라고?
호우시절의 허진호라고? 

다시 잠시 옆길로 빠지자면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국민감독 자리에 오른 허진호의 팬인데
그의 대표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을 간다를 모두 봤지만
'호우시절'이란 영화에 흠뻑 빠져 그의 팬이 됐다. 
그 유명한 전작들은 아마도 남녀 간의 복잡미묘하고 애매한 사랑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에 봤기 때문에 큰 감동이 없어서 그랬나 싶다.
(이영애 바보! 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ㅠㅠ) 
아무튼 호우시절이라는 맑고 깨끗한 영화를 보고 심지어 정우성에게마저 빠져버렸었다.
아직도 대나무 밭 사이로 걸으며 두보의 시를 읽는 정우성이 눈에 훤하다.

하여간 취향에도 맞지 않고 그저 우중충하고 애국심이나 강요하는 영화겠거니 하고 넘기려던
덕혜옹주를, 그저 허진호라는 이름 석자 때문에 보게 됐다. 
이미 내 맘에서 떠나보낸 최동훈이 최근에 만든 암살도 봤는데 뭐. 

결과적으로는 매우 잘 한 선택이 됐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중이다. 
여운이 길게 남은 좋은 영화였다. 

독립운동이나 당시 시대상황보다는 그저 한 여인의 불행했던 삶에 초점을 맞춰
덕혜에게 고스란히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그 점을 감독님께 매우 감사. 
또한 그 자신이 정말 덕혜인 것만 같았던 손예진 덕분에도. 
조선으로의 입국이 거절당했을 때 바닥에서 꺽꺽거리고 웃던 장면만 좀 어색했고,
- 이렇게 말하니 연기평론가가 된 것 같지만, 그 장면은 개인적으로는 몰입을 깼다. 
  조현병을 앓았다던 덕혜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 연기를 하는 것 같았음.
  이때부터 미쳤다! 이렇게 알려주는 듯 했음.
다 늙고 나서의 분장에, 눈만은 절대 늙지 않은 것 같아서 어색했지만 그 정도는 넘어갈 정도로
손예진 이번 영화는 정말 훌륭했다.

박해일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나는 뭐 질투는 나의 것부터 박해일의 팬이었으니까.
연애의 목적에서처럼 병맛 캐릭터를 연기해도 한 번도 저버린 적 없었으니까.
고령화가족에서처럼 쓔레기(ㅎㅎㅎ) 캐릭터를 연기해도 한 번도 저버린 적 없었으니까.
이번 박해일 캐릭터는 인어공주, 국화꽃향기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특히 나는 계속 인어공주의 김진국 생각이 났네 ㅎㅎ


영화에서는 재밌는 장면이 몇 나온다. 허진호스러운 유머라고 해야하나 배우들의 케미가 잘 맞은건가.

1. 김장한과 한택수가 마주앉아 술을 한 잔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택수의 꿈이 원래는 제국의 군인이 되고 싶었던 거라고 말하자 김장한이 자신의 군복을 입어보라 권한다. 
작은 듯한 핏이었는데, 김장한이 잘 어울린다고 추켜세우자 한택수는
'자네, 앞으로 형이라고 하게' 라면서 찡긋인다. 
우리나라에서 어딘가 서로 공감하는 사이에서 호칭하는 '형'. 그것을 알고 있는 한택수도 한국인이다. 
나는 이 장면이 정말 좋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일제에 맞추고 일본인 흉내를 내고 살아도,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바뀔 수 없다.  
왠지 그것을 조롱하는 장면 같았다.


2. 일본에 징용 끌려온 동포 앞에서 일제를 두둔하는 연설을 억지로 하게 된 덕혜가
결국 다 잇지 못하고 그들을 위로하다 한택수의 분노를 사 따귀를 한대 맞는다. 
그 다음 장면이 압권인데, 덕혜의 유모였던 복동이가 한택수를 '닥닥닥닥!!' 머리통을 휘갈겨 버림.
역시 라미란의 미친 존재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3.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우왕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고수가 연기함.

진심으로 고수가 문 열고 들어올 때 너무 잘생겨서 탄식이 나왔다. 
영화관 군데군데에서 '아~'하고 비슷한 종류의 탄식이. 그럴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고수니까.
어쩜 그리 잘생겼는지. 이제 영화만 찍어주면 좋겠다. 


4.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해변가 장면이다.

10분 후에 뒤따라 간다는 장한을 뒤로하고 덕혜가 급하게 달려 나온 곳은 배가 기다리고 있을거라던 해변.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했지만, 해변가에 몸을 숨길만한 곳이 어딨겠어.
덕혜가 그 간절한 마음으로 해변가로 뛰쳐나와 달리는 컷을 위에서 잡아주는데
의지할 것도 가릴 것도 아무 것도 없이 끝도 없는 바닷가를 향해 무방비 상태로 뛰는 덕혜.
그녀의 운명을 그 한 장면으로 모두 압축해서 보여준 것 같았다. 감독의 연출력이란ㅠㅠ
외롭고 기댈 곳 없는 덕혜를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 장면이 난 너무 마음 아팠다.

  
5. 이 모든 아픔과 쓸쓸함은, 결국 덕혜가 귀국해 조선 땅을 밟을 때 터져버렸다. 
봇물처럼 터져서 꿀럭꿀럭 울고 말았다. 


그 밖에도 덕혜옹주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계몽이라는 건 별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자연스러운 배경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는 것 같다. 

당연히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친일파'에 대한 생각. 
특히 한택수라는 인물을 통해 기회주의자의 삶을 생각해봤다. 
지독할 정도로 일제에 굽신대고 조선 왕족과 조선을 괴롭히던 그는,
해방하자마자 조선으로 입국한다. 그것도 호위를 받으며. 
그것은 오매불망하던 조선으로의 입국이 거부돼 바닥에 나뒹구는 덕혜와 매우 상반된 행보다.
여기 한택수로 대표되는 친일파들을 조선이(이승만 정권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 친일파들은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 기득권층으로 남아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시겠다

이 영화는 복선이고 뭐고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다가 그럴만한 장르도 아니다. 
어차피 귀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조선으로 가고자 하는 덕혜의 노력이 정말 가슴 아팠다. 
국뽕이 싫고, 애국심 강요가 싫지만서도 당시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조선 독립을 열망했고,
조선으로의 귀국을 갈망했을지, 그 마음만은 절대 무시하거나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슬픈 것은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볼 때마다 확신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이란 건 절대 하면 안 된다.
독립유공자와 애국지사의 예우와 처우를 보라. 국가와 정부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에 의해 희생된 모두를 추모한다. 독립운동을 했든 안했든, 희생된 모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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