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동의하에(슬프다ㅠㅠ) 모처럼 자체영화제를 가졌다.
(*자체영화제는 내가 그냥 만든 말로 영화제에서 영화보듯이 하루 온종일 시간 맞춰서 영화만 보는 날을 말함)
지난 달 말에 안시성과 명당을 연이어 봤다가 너무나 빡치고 그 분노가 오랫동안 가라앉지를 않아 고생한 후로 '잘 만든 영화'에 매우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 영화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세종에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으므로 그 자체에 대한 갈증도 자체영화제를 부추겼다. 결혼 후 달라진 점은 하루 온종일 영화관에 앉아 있으려면 남편에게 허락을 득하거나 최소 '보고'는 해야 한다는 것. 속상했지만 그래도 나의 취미문화생활을 이해해주는 남편을 가진 것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허락을 득하는 척 보고하는 것은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하고 있다.
황금같은 휴일을 하루종일 내서 영화를 본다는 부인을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이미 남편은 내가 일전에 안시성+명당 크리로 매우 분노에 쌓여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거절하기 힘들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별 관심 없는 영화를 종일 함께 보기엔 두렵고 혼자 남아서 집을 지키는 것도 심심하니, 남편은 스스로와 타협해 내가 보겠다고 내놓은 영화 다섯 편 중 두 편을 함께 하고 한 편은 포기하기를 부탁했다. 나로써는 마지막 영화(너는 여기에 없었다)가 아쉽기 그지 없었지만 -왜냐하면 케빈에 대하여 이후로 이 감독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어서 매우 궁금했음- 남편의 양보와 배려에 나 또한 욕심을 줄였다.
그래서, 내가 하늘이 열린 날 본 영화는 1)곰돌이 푸:다시 만나 행복해 2)체실 비치에서 3)라스트 포트레이t 4)판타스틱 Mr.폭스
남편은 1, 2를 함께했다. 1은 남편의 의지고 2는 나의 요구였다. 남편에게 이성의 사랑 속에서 생기는 갈등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체영화제에서 본 영화들 중 내가 리뷰하려고 하는 것은 '체실 비치에서'다.
당일 본 영화 중 가장 여운이 많이 남아 있다. 이언 매큐언 소설 베이스라고 하는데, 이번엔 저자가 각본까지 참여했다고. 그의 소설은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단한 이야기꾼+필력가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흡입력있는 시나리오를 언제 보았던가. 안시성+명당 콤보로 인한 상처가 싸그리 씻겨 내려갔다. (아니 이미 곰돌이 푸에서 씻겼음 ㅎㅎ)
영화는 대충 이렇다.
대학 졸업반(맞겠지)에 만난 두 어린 연인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결혼했으나 아직 어린 관계로 좋은 감정, 사랑하는 마음만을 나눌 줄 알았지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할 줄 몰라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뜨겁게 사랑했음에도 이별을 맞는다.
매우 진부한 사랑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막상 까보면 이렇게 훌륭할 수가 없다. 왜 훌륭한가, 하면 헤어지는 연인들의 오해와 빗나간 애정, '잘모름' 등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뭉뚱그리지 않는다.
먼저, 이 영화는 라라랜드와 비교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첫사랑, 실패, 황혼의 만남, 깨달음 등 라라랜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다만 주인공들이 노래를 하지는 않음 ㅎㅎ) 처음 영화를 보는 동안은 두 주인공이 아주 예쁘고 귀여워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린 연인, 열정적이지만 풋풋한 사랑, 첫 경험, 부끄러움, 자존심, 체면...처음 사랑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연애나 결혼 등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달랐던 2명의 타인이 서로의 세계를 만나게 하고 나아가 그 세계를 조금씩 합치려는 시도다. 두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는 두 개의 세계는 서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연애(결혼)이다. 각자의 상처와 부끄러움 등을 숨기고 자신의 길을 걷던 두 사람의 길이 합쳐지기 위해서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려놓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
나는 이 영화가 그 두 세계의 만남을 아주 섬세하게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 세계가 교집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 모습을 그 옛날 그 과정을 겪어온 사람의 정곡을 찌를만큼 적나라하고 확실하게 보여준다.
남주 에드워드는 역사학을 전공했고, 나무 이름도 새 이름도 잘 아는 (여친 엄마에 따르면) '순진한 촌뜨기'로 아픈 어머니 때문에 항상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청년이다.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게 생겼는데 집에서 아무도 관심이 없자, 1등한 것을 자랑하거나 칭찬받고 싶어서 밖으로 돌아다닌 것이 여주를 만난 계기가 됐을 정도다.
한편 여주 플로렌스는 부유한 집안이지만 엄마도 아빠도 여주의 남친이 기우는 집안의 아들일까봐 걱정하는 조금 허영심 많은 부모의 딸인데다가 본인은 클래식(바이올린)을 전공했으며 크로아상과 바게트가 뭐가 다른 줄도 모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다.
이렇게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모두 다른 두 남녀가 사랑과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물들이는데, 플로렌스의 콰르텟을 보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플로렌스의 꿈을 이해하고 응원하려는 에드워드와 에드워드의 아픈 어머니가 그의 가장 큰 상처라는 것을 알고 어머니와 두 동생을 변화시키고 그의 집을 정돈하는 플로렌스는 살면서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일들을 '사랑'이라는 힘으로 조화시켜 나간다.
하지만 (내 생각엔) 플로렌스의 상처를 에드워드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서 두 사람 간의 균열이 시작됐다. 보아하니 플로렌스는 어릴 적 아버지한테 성추행 비슷한 일을 당했던 것 같은데...영화는 그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예비사위와의 기싸움에서 지는 것을 본 딸에게 열폭 이상의 화를 낸다거나, 어릴 때 아버지와 둘이 간 여행 회상 장면을 군데군데 삽입한 것, 결정적으로 에드워드가 사정할 때 어린 플로렌스가 누워서 몸을 사리고 있고 아버지가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 것이 바로 플로렌스의 상처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아픔을 사랑하는 에드워드에게 말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못한다. 오히려 갈등이 폭발한 뒤에 '우린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니까 섹스 없이도 잘 살 수 있잖아. 원한다면 다른 여자와 해도 좋아, 널 사랑하고 너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라고 애원한다. 에드워드는 당연히 사랑하는 플로렌스가 자신에게 '다른 여자와 자도 좋다'라고 말하는 것에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에드워드가 플로렌스를 기다려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랑하는 둘은 그래도 헤어졌을까. 분명 둘은 서로를 배려했고,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서로 조금만 다른 방법으로 배려했으면 어땠을까. 아니, 다른 방법으로 배려하는 법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둘은 서로의 세계를 합치려고 맹세한 그 날, 실패해버렸다. 결국 둘은 함께 걸어가기를 포기하고 각자의 삶으로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연애할 때는 양보하고 눈치 보며 상대방에게 맞추고 희생하다가 결혼생활을 목전에 두고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관계가 깨졌다.
에드워드는 '함께 돌아가자'는 플로렌스를 거부했고, 결국 둘은 결혼한 지 하루만에 이혼했다.
아프다. 아팠다. 왜냐면 나이가 먹은 나는 이제, 그런 상황이 오면 저런 오해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배려랍시고 '다른 여자랑 자도 돼'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지금 당장 섹스가 어렵다고 했을 때 '넌 나쁜 여자야 사이건 사기결혼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중한 첫사랑이 깨졌을 때 참 마음이 아팠다. 나도 그땐 그랬을테니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땐 몰랐을테니까.
영화는 그들의 황혼기까지 보여줬다. 에드워드는 히피 청년으로 살아가고, 플로렌스는 결혼해 세 자녀와 몇 손자를 두면 살았다고 말이다. 굳이 플로렌스의 결혼생활을 설명한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섹스는 못하겠어!'라고 울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플로렌스는 그 아픔을 잘 극복했는지 금슬 좋게도 자녀를 셋이나 두고 은퇴를 앞뒀다. 아마 에드워드의 어리숙함과 어리석음을 꼬집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섹스를 못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흔히 예상 가능한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가 경제적 차이나 교육수준 등을 넘어서서 훨씬 더 복잡하고 사적인 이유로 이별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커플을 보여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 말미에 눈물을 쏟았다. 뻔했지만 영화는 결국 나를 울렸다. 참 잘 만든 영화다.(나를 울려서가 아니고 ㅎㅎ)
여주인공인 시얼샤 로넌에게 반했다. 나는 이 배우를 '러블리 본즈'라는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그땐 참...못생기고 매력도 없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자주 나오지는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 사람보는 눈은 진짜 거지수준임.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나 레이디 버드, 그리고 반고흐(성우만) 이런 필모를 쌓으면서 무지 개성있는 배우가 됐다. 레이디 버드 때도 딱 맞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로 그 방점을 찍었다. 아주 아름다웠고 그 연기가 매우매우매우 훌륭했음.
나는 영화에 감동을 받아 감독의 필모를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입봉작이었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영화를 연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감독. 도미닉 쿡. 차기작 나오면 반드시 꼭 다시 봐야지.
아 그리고 OST도 감동적이었다. 안시성 싸구려ost때문에 너무 화가 났었는데, 이 영화는 과함도 덜함도 없이, 클래식과 로큰롤을 어찌나 제대로 조화시켰는지. 장면장면마다 필요하지 않은 음악이 없었고,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없었다. 귀마저 행복했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