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황금가지
532페이지,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책을 어제 휴일 하루를 통째로 내어 샅샅이 읽어 내렸다. 멈출 수가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분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책이었다. 엔딩마저 아쉬운지 시원한지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책이었다. 연휴 마지막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두 시까지 이 책을 읽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설정을 두고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세계만 생각해서 지금 이 시점(2018)보다 미래의 일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85년. 내가 두 살 때다. 어쩐지. 컴퓨체크, 컴퓨토크 이런 어색한 신조어가 나오더라니.(뒤에 찾아보니 이 책은 1984, 멋진 신세계 등과 함께 디스토피아를 그린 3대 소설이라고)
지금 이 책으로 드라마가 제작돼 지난해 에미상을 휩쓸었다고 하니 워낙 유명한 시놉이라 이곳에 적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지나친 난개발, 전쟁, 환경 오염, 각종 성질환 등이 인간의 건강에 영향을 끼쳐 인류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출산마저 어려워진 때, 기독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부 극우 보수주의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여성을 가임-비임 여성으로 계급을 나눠 가임기 여성을 출산 집단화시키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시켜버렸다는 세계관이다. 소름이 끼쳤다. 작가는 1980년대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책은 독특한 구조다. 전적으로 화자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다. 화자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다. 주인공인 화자는 본인이 출산 도구인 ‘시녀’계급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하거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회상하는 등 특별한 짜임새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해 나간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독특한 액자식 구조를 느꼈는데, 주인공의 내면과 주인공이 살고 있는 외부환경이 마치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인식되며 독자인 나 역시도 주인공의 안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갔다 하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안개 낀 듯한 뿌옇고 우울한 기분이었다가 실제 그의 생활을 설명할 땐 선명한 영화 같은 느낌. 작가의 필력이 사뭇 감탄했다. 처음엔 이렇게 하루 종일 붙들고 앉아 읽을 생각도 아니었다. 두껍고 다소 무거운 내용의 책이니 천천히 나눠서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빠져들게 된 것이다.
문장도 수려했다. 그저 내용과 아이디어만 번뜩이는 것이 아니라 문체 하나하나 아름다웠고, 또한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시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은유와 사설을 넘나드는 작가의 필력에 쏙 빠져들어 마지막 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은 원래 직장과 아이와 남편이 있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족의 일원이었다. ‘어떤 사건’이후 그는 가임 여성으로 분류돼 강제로 ‘시녀’계급에 편성됐고, 그에 맞는 교육을 받는다. 교육이라는 것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숙명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신성한 일 우리는 우리의 몸을 국가 존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 명령에 거역하지 못하는 아주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인 그는 저항하는 친구와 다르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야말로 애쓰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여성들은 먼저 직장과 돈을 빼앗긴다. 여성에게 '일'을 할 권리와 '돈'을 쓸 권리가 사라진다. 그다음은 이름을 빼앗긴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정체성과 존엄성을 뺏기는 아주 큰 문제다. 우리도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에. 그들은 민족정신과 얼을 훔치고 완벽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단 말과 이름을 뺏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게 된다. 주인공 역시 본명을 빼앗기고 '오브프레드'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of fred. 그러니까 프레드의 것이라는 뜻이며 여자가 다른 사령관에게 배정됐을 때 배정된 사령관의 이름으로 바뀐다. 예컨대 of smith. 인격은커녕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런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기력과 의존성이 학습돼 버린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렇게 무섭다.(feat. 창씨개명)
작가가 묘사한 것 중 사령관 집에 배속된 시녀가 사령관과 관계를 가질 때의 장면이 가장 괴이했다. 사령관의 아내가 다리를 벌리고 침대에 기대앉으면 하얀 면속곳만 빼고 드레스업 한 시녀는 아내의 다리 사이, 그러니까 아내의 배 위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내는 팔을 뻗어 시녀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시녀의 양 팔을 위로 당긴다. 그러면 옷을 모두 갖춰 입고 바지만 내린 사령관이 시녀의 드레스를 들추고 다리를 벌려 그야말로 ‘관계’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꼬락서니인가. 책을 손에 놓고 ‘기억’에만 의존해 독후감을 쓰는 지금도 그 장면이 너무나 또렷하다. 성관계에서 주는 쾌락은 그저 오락일 뿐이며 성관계는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궤변이 만들어 낸 미친 장면이다.
주인공은 ‘의례’라 불리는 그 관계를 가질 때 동물처럼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애처롭고 또 애처롭다. 그는 스스로 그저 아이 낳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우고 자괴감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반면 사령관은 고귀하다. 두 여성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마치 책을 읽듯이 사정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리를 뜬다. 열등감을 주는 것도 하나의 장치다. 그들이 여성을 ‘동물’로 취급하기 위해 만든 장치에 상처받는 것은 여자와 여자. 아내와 시녀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인 중 한 명도 ‘전국 가임지도’라는 것을 만들어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출산율이 갈수록 떨어지니 전국의 가임 여성을 조사하고 분석해 그들이 아이를 낳게끔 하자는 것이다. 같은 정치인이 했던 말 중에는 ‘외국에서 아이 및 여성을 수입하자(갑자기 조선족도 우리 식구)’는 것도 있었다.
성과 권력과 여성인권과 종족 번식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하게 만든 이 책은 결국 주인공이 탈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주인공은 빛을 만났을까, 어둠을 만났을까. 하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2195년(맞나?) 어떤 학술회를 묘사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것은 주인공의 독백이 담긴 테이프를 녹취한 것이며, 그런 테이프를 남겼다는 것은 그가 살아남아 지하에서 저항했다는 의미일 테니까.
1984등을 비롯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보고 나면 나는 이것이 암울한 세계인지, 암울함 속에서 빛과 희망을 찾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시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부조리하고 비도덕적인 현실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독자에게 깨달음을 주고 올바른 방향이 어디인지 한 번 더 생각하는 기회를 준다. 작가는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이 ‘잘못됐다’고 알려주고 사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고 통찰력도 뛰어나 감명받은 문장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내 감정이 가장 고조됐던 부분은 여기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 망상에 시달리는구나. p.310
우리에겐 아직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뭐가 남았는지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자기 루크는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루크는 아무것도 빼앗긴 게 없었다. (중략) 나는 쪼그라든 기분이 들었고, 그가 팔을 내게 두르고 안아 올렸을 때는 인형처럼 작아진 듯이 느껴졌다. 사랑이 나만 버려두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 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p.315
남자와 여자 즉 이성은 '이성'일 뿐 같은 행복을 추구하고 같이 아파하는 '인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성 차이를 힘과 계급의 차이 또한 그것이 권력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남성이고 여성이고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자각해 '차별받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누가 누구의 우위에 서겠다는 권력 다툼이 아님을 모든 인류가 알고 변화해야 한다. 1985년에 나온 소설이 꼬집는 바를.
작가는 이 소설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등의 용어가 붙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아마 편견에 시달리기 싫어서라고 생각한다. 보다 많은 사람이 읽고 보다 보편적인 평가와 해석이 나오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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