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2018/11/29 19:07

#5. 키워서 돌려주고 싶은 위로 결혼생활

나는 직업 특성상 월말에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한 달을 보낸다. 진을 다 빼고 퇴근을 하면 집으로 오는 길도 놀러 나가는 길도 즐겁거나 활기찰 수 없다. 집에서는 남편에게 짜증을 내기 일쑤고 친구들을 만나면 말수가 없어지며, 말수가 없어지는데 이상하게 산만하다. 매우 소모하는 월말을 보내는 셈이다. 

여느 때처럼 오늘도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틱, 카톡 메세지가 온다. 

‘우분투북스님이 보내신 택배가 문 앞으로 배달 되었습니다’ 

우분투북스?? 이게 뭐더라...? 하고 보니 지난달인지 이달 초인지 언젠가 신청한 도서 정기구독이다. 바로 생각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우분투북스를 방문도 해보지 않고 책방지기 아저씨와 대화도 해보지 않고, 그저 그의 글을 보며 그의 대외활동을 보며 그 행보가‘멋있어’서 모험을 감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유행하던 잡지구독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마음 속 어떤 부분이 동했을까. ‘대기인원이 많다는 주의사항을 본 것 같은데 벌써 내 자리도 생겼나? 생각보다 일찍이라 의외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메세지를 치웠다. 마감시즌이었으니까, 도대체 뭐가 왔을지 상상해보는 즐거움은 사치다. 점심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돼 오후 내내 괴로웠다. 흔히 말하는 ‘위산 역류’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기사를 검토했다. 사진을 요청했다. 퇴근하기 10분 전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귀가시간이 늦단다. 기운이 더 빠진다. 오늘 같은 날 집에 남편이 있어주면 좋으련만. 오늘은 춤을 추러 갈 곳도 없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에어프라이어를 떠올렸다. 아빠가 준 고구마도 생각났다. ‘고구마나 구워 먹어야겠다...’

퇴근하자마자 10분 만에 집으로 날아왔다. 몸에 걸친 무거운 것들은 다 벗어버리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그렇게 올라와보니 현관 앞에 ‘엇, 이게 뭐지?’ 박스 하나가 와 있고 이제야 아까 낮에 받은 카톡 메세지가 생각이 났다. 갑자기 마음이 달뜨기 시작했다. 급해지고 설렜다. 집에 들어와서 박스를 테이블 가운데 보석상자처럼 놓아 두고는 옷을 갈아 입었다. 순서도 엉망진창, 머플러를 풀고 양말을 벗고 스커트를 벗고 코트를 벗고...왜 차분하지 못했을까. 

실내용 복장을 하고 거실에 나와 박스를 끌러 보려는데 거실에 빨래건조대에 그득히 널려 있는 빨래가 눈에 들어왔다. 못해도 5일은 매달려 있는 마른 빨래들이다. 어딘지 찝찝해서 빨래를 먼저 개기로 했다. 뒤에 할 일을 만들어놓고 싶지 않았다. 빨래를 개는 것도 엉망진창이었다. 일어났다 앉았다, 수건을 개고 화장실로 갔다가 내 속옷을 개고 방에 갔다오고, 남편 티셔츠를 개다가 내 양말을 개고...나답지 않게 비효율적이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의 보석상자를 흘끗흘끗 염탐했다. 신데렐라의 작은 쥐들이 나타나 내 대신 뚜껑을 열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이 계속 달아오른다. 조금씩 흥분됐다. 박스 속에 어떤 책이 들었을까. 

건조대 정리까지 마치고 테이블로 오는데 거실 사방에 티끌이 눈에 밟힌다. 오늘 왜이러지. 결국 다이슨으로 거실과 하는 김에 안방까지 슥 밀어줬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구석구석도 밀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개봉이 미뤄지는 걸 즐기고 있는 듯했다. 드디어 마음이 조금 진정된 것이다. 정말 천천히, 꼼꼼하게 바닥의 티끌을 빨아들였다. 다이슨은 참 일을 잘하기도 하지. 윙윙거리며 먼지를 빨아들이는데 내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드디어 개봉.

다행히 내가 가지지 않은 책 네 권과 손편지. 얼마만에 받아보는 애인이 아닌 사람의 손편지지? 다섯 번은 읽었다. 사람의 손글씨가 이렇게 안정을 주다니. 책을 살펴보다 문득, 눈물이 고였다. 물론 흘리진 않았다. 그건 오바지.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완전한 타인이 내가 제공한 아주 희미하고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나를 위해 이 책 네 권을 골라줬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았다. 눈물의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었을까. ‘누군가 나를 위해서’ 

참으로 타인을 위해, 타인을 배려하며, 타인을 고려하며 살기 힘든 세상이다. 하물며 평생 동지라는 남편과도 그것이 어려워 가끔 티격태격하는 원인이 되곤 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마음을 받은 기분이 들어 고단했던 오늘 하루가 어루만져지는 것 같았다. 주말엔 꼭 찾아가 봐야겠다. 책방지기 아저씨와 꼭 얘기해보고 싶다.


덧글

  • 이요 2018/11/30 09:40 # 답글

    아는 분 얘기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요...^^
  • 아삭 2018/11/30 10:09 #

    우분투북스 책방지기님 말씀하시는거죠? 아는 분이세요? 참으로...좁은 세상^^ 아직 이번달 정기구독분이 도착하지 않아서 애가 닳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하루를 갈구하고 있다고 할까요...ㅠ
  • 이요 2018/11/30 10:11 #

    되게 잘 아는 건 아니구요 얼굴만 아는 사이...^^;; 정기구독 하는 건 알았는데, 받으신 분 후기는 처음보는 지라 이렇게 하시는구나 싶었네요. 이달 것도 잘 도착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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