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순전히 넷플릭스 때문이다. 신규콘텐츠가 등록됐다며 나를 유혹했다. 넷플릭스 이 시끼. 시놉은 그렇게 식상하고 단순할 수가 없다. 예술? 진정한 예술의 가치? 뭔가 클리셰로 범벅이 돼 있는 듯했다.
다만 의외였던 것은 그동안 많은 영화감독이 오롯이 예술인을 다룰 때 단지 흥행을 이유로 외설과 예술의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예술을 외설로 덮어버렸었다면, 이 영화는 외설일 듯 하면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예술을 표현했다는 것.
이 영화의 문제점은 다른게 아니다. 캐릭터가 모두 죽어 있었다는 것. 핵심 주인공 셋의 캐릭터가 너무나 평면적이고, 그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세먼지만큼의 갈등도 발생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 조차 갑자기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ㅃ...가난한 아가씨가 돈 왕창 받으면서 '누드모델'하는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시대가 무려 1960년대인데) 오히려 불쌍한 주인공을 모두가 물심양면 잘 챙겨주고 있다. 착한 사람은 무조건 착하고, 나쁜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나쁜 놈이다.
심지어 주인공을 질투하던 어린 하인조차 그녀를 질투한다기 보다 자신을 모델로 써주지 않는 조각가에게 (살짝) 삐지는 정도다. 하인이 제멋대로 조각가 앞에서 옷을 훌렁 벗고 '저는 모델 안 될까요?' 라고까지 해봤지만 묵묵부답인 조각가에게 상처받고 돌아서서 한참을 울길래, 나는 그 하인이 뭐라도 해코지를 하고야 말 줄 알았다. 하다못해 성희롱 당했다고 모함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긴장했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음. ㅎㅎㅎ 참 착하디 착한 조연이다.
조각가의 부인은 조각가가 재기할 수 있도록 예쁘고 어린 모델을 직접 구해주면서 단 한 차례도 조각가와 모델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집 하인이 장을 볼 때 모델의 것까지 함께 보게 하고, 예쁜 옷을 사다 입히고, 큰 돈을 요청해도 별 다른 의심 없이 구해다 줄 정도로 모델에게까지 깊은 배려를 한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예술에 대한 믿음이었을까. 영화는 부인을 통해 순수한 예술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예술가 남편을 둔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예술가들이 그렇게 더러운 것이 아니야!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데 부인이 의심하거나 하는 것이 이상한 거지. 남편과 예술을 믿으면 돼.'
그렇지만 영화는 부부의 감정선을 놓쳤다. 부인이 남편을 위해 헌신하고 속 깊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으나 남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그렸다. 일은 일이고 가정은 가정이다. 일관되게 영화가 주장하고 있었으나, 남편이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서로 금슬이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조각가인 남편은 모델에게 더 감정이입하고 모델을 아끼고 챙기는 모습이 더 두드러지게 연출됐다. 나중에는 '너에게 해줄 게 이것밖에 없다'면서 그를 괴롭히던 남편을 살해까지 해주고서는 갑자기 자기 부인에게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네.'하고 자살해버리는 식이다. 도무지 부부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또한 모델의 남편은 '악인'이어서, 착한 모델을 괴롭히는 나쁜 남편을, 상식적이고 경우 있고 도리를 아는 상류층이면서 '시한부'인 조각가가 '죽여주고' 떠나는 것을 관객에게 설득하려 했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 살해에 정당성이 있던가. 나쁜 놈이면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을. '난 곧 죽을 목숨이니까, 널 위해서 내가 해치우고 떠날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치관을 상식적인 사람이 행하게 함으로써 정당성을 부여하고 감동을 주입하려 했다. 차라리 도박에 빠져 있는 모델의 남편이 거액을 잃은 투기꾼에게 살해당했다면 이해를 했겠다. 조각가와 부인과 모델과 모델의 남편 캐릭터를 느릿느릿 애써 구축해놓고 왜 조각가에게 총을 쥐어주었는가. 입안이 텁텁하다.
영화에서 건질 것은 김서형 배우의 연기와 영상, 음향, OST 정도다. 이유영 배우도 점점 예술에 눈 떠가는 촌부의 역할을 잘 해냈으나 사투리가 너무 어색해서 몰입을 방해했다. 뭐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거기 나오는 모든 이의 사투리가 어색했다. 굳이 왜 배경이 포항인지 잘 모르겠는 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배경은 분명히 여름이고, 여름이 가면 가을 혹은 겨울이 온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봄인가. 그 궁금증은 영화 말미, 자살 전 부인에게 남긴 편지에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몸이 아팠던 조각가는 재능의 발현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한 상태, 그러니까 겨울이 온 상태였는데 부인이 좋은 모델을 구해다 주고 정성을 쏟는 등 아낌없는 지원에 다시금 예술혼이 불타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나의 마음에 봄이 온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편지에 대놓고 쓰는 방법이 아니었다면 아마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전혀 모를뻔 했다. 급기야 그 편지의 내용에 그 어떤 공감도 가지 않았다. 조각가는 생전 부인에게 전혀 살갑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인이 그 따뜻하고 속깊은 배려를 하는 동안 조각가는 종결이 보이는 자신의 삶을 괴로워하기만 했고, 조각가의 상태가 밝아지기 시작한 것은 모델과의 예술적 교감 때문이지 부인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당신 덕에 나에게 봄이 왔다니?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감독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조각가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목발을 짚고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길래 루게릭인가 싶었는데, 마음의 상태가 좋아지면서 목발도 놓고 데생도 찰흙 작업도 자유롭게 하길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가? 마음의 병인가? 싶었었다. 그런데 또 병세가 악화됐다고 나온 후로는 손가락이 굳고 코피를 흘리고 다리가 꺾여 쓰러지는 연출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대체 조각가는 무슨 병에 걸린건가. 조각가의 병은 그저 스토리와 화면과 사연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 밖에 안 된다. 따라서 조각가가 아픈 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득력이 없었고, 공감이 안 갔다.
배우의 연기와 화면이 아까운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애써 리뷰를 쓰는가 하면, 좋은 영화를 봤을 때 그 기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워 벅차게 리뷰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딴 영화를 보면 너무 빡쳐서 뭔가 쓰지 않고는 속터져서 못견디기 때문이다.
하아.
다만 의외였던 것은 그동안 많은 영화감독이 오롯이 예술인을 다룰 때 단지 흥행을 이유로 외설과 예술의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예술을 외설로 덮어버렸었다면, 이 영화는 외설일 듯 하면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예술을 표현했다는 것.
이 영화의 문제점은 다른게 아니다. 캐릭터가 모두 죽어 있었다는 것. 핵심 주인공 셋의 캐릭터가 너무나 평면적이고, 그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세먼지만큼의 갈등도 발생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 조차 갑자기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ㅃ...가난한 아가씨가 돈 왕창 받으면서 '누드모델'하는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시대가 무려 1960년대인데) 오히려 불쌍한 주인공을 모두가 물심양면 잘 챙겨주고 있다. 착한 사람은 무조건 착하고, 나쁜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나쁜 놈이다.
심지어 주인공을 질투하던 어린 하인조차 그녀를 질투한다기 보다 자신을 모델로 써주지 않는 조각가에게 (살짝) 삐지는 정도다. 하인이 제멋대로 조각가 앞에서 옷을 훌렁 벗고 '저는 모델 안 될까요?' 라고까지 해봤지만 묵묵부답인 조각가에게 상처받고 돌아서서 한참을 울길래, 나는 그 하인이 뭐라도 해코지를 하고야 말 줄 알았다. 하다못해 성희롱 당했다고 모함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긴장했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음. ㅎㅎㅎ 참 착하디 착한 조연이다.
조각가의 부인은 조각가가 재기할 수 있도록 예쁘고 어린 모델을 직접 구해주면서 단 한 차례도 조각가와 모델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집 하인이 장을 볼 때 모델의 것까지 함께 보게 하고, 예쁜 옷을 사다 입히고, 큰 돈을 요청해도 별 다른 의심 없이 구해다 줄 정도로 모델에게까지 깊은 배려를 한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예술에 대한 믿음이었을까. 영화는 부인을 통해 순수한 예술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예술가 남편을 둔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예술가들이 그렇게 더러운 것이 아니야!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데 부인이 의심하거나 하는 것이 이상한 거지. 남편과 예술을 믿으면 돼.'
그렇지만 영화는 부부의 감정선을 놓쳤다. 부인이 남편을 위해 헌신하고 속 깊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으나 남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그렸다. 일은 일이고 가정은 가정이다. 일관되게 영화가 주장하고 있었으나, 남편이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서로 금슬이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조각가인 남편은 모델에게 더 감정이입하고 모델을 아끼고 챙기는 모습이 더 두드러지게 연출됐다. 나중에는 '너에게 해줄 게 이것밖에 없다'면서 그를 괴롭히던 남편을 살해까지 해주고서는 갑자기 자기 부인에게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네.'하고 자살해버리는 식이다. 도무지 부부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또한 모델의 남편은 '악인'이어서, 착한 모델을 괴롭히는 나쁜 남편을, 상식적이고 경우 있고 도리를 아는 상류층이면서 '시한부'인 조각가가 '죽여주고' 떠나는 것을 관객에게 설득하려 했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 살해에 정당성이 있던가. 나쁜 놈이면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을. '난 곧 죽을 목숨이니까, 널 위해서 내가 해치우고 떠날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치관을 상식적인 사람이 행하게 함으로써 정당성을 부여하고 감동을 주입하려 했다. 차라리 도박에 빠져 있는 모델의 남편이 거액을 잃은 투기꾼에게 살해당했다면 이해를 했겠다. 조각가와 부인과 모델과 모델의 남편 캐릭터를 느릿느릿 애써 구축해놓고 왜 조각가에게 총을 쥐어주었는가. 입안이 텁텁하다.
영화에서 건질 것은 김서형 배우의 연기와 영상, 음향, OST 정도다. 이유영 배우도 점점 예술에 눈 떠가는 촌부의 역할을 잘 해냈으나 사투리가 너무 어색해서 몰입을 방해했다. 뭐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거기 나오는 모든 이의 사투리가 어색했다. 굳이 왜 배경이 포항인지 잘 모르겠는 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배경은 분명히 여름이고, 여름이 가면 가을 혹은 겨울이 온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봄인가. 그 궁금증은 영화 말미, 자살 전 부인에게 남긴 편지에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몸이 아팠던 조각가는 재능의 발현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한 상태, 그러니까 겨울이 온 상태였는데 부인이 좋은 모델을 구해다 주고 정성을 쏟는 등 아낌없는 지원에 다시금 예술혼이 불타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나의 마음에 봄이 온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편지에 대놓고 쓰는 방법이 아니었다면 아마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전혀 모를뻔 했다. 급기야 그 편지의 내용에 그 어떤 공감도 가지 않았다. 조각가는 생전 부인에게 전혀 살갑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인이 그 따뜻하고 속깊은 배려를 하는 동안 조각가는 종결이 보이는 자신의 삶을 괴로워하기만 했고, 조각가의 상태가 밝아지기 시작한 것은 모델과의 예술적 교감 때문이지 부인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당신 덕에 나에게 봄이 왔다니?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감독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조각가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목발을 짚고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길래 루게릭인가 싶었는데, 마음의 상태가 좋아지면서 목발도 놓고 데생도 찰흙 작업도 자유롭게 하길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가? 마음의 병인가? 싶었었다. 그런데 또 병세가 악화됐다고 나온 후로는 손가락이 굳고 코피를 흘리고 다리가 꺾여 쓰러지는 연출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대체 조각가는 무슨 병에 걸린건가. 조각가의 병은 그저 스토리와 화면과 사연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 밖에 안 된다. 따라서 조각가가 아픈 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득력이 없었고, 공감이 안 갔다.
배우의 연기와 화면이 아까운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애써 리뷰를 쓰는가 하면, 좋은 영화를 봤을 때 그 기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워 벅차게 리뷰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딴 영화를 보면 너무 빡쳐서 뭔가 쓰지 않고는 속터져서 못견디기 때문이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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